독서 주방
파불루머 유재덕이 들려주는 책과 인생 이야기!
27년차 호텔리어 셰프가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긴 책의 맛은 어떨까? 웨스틴조선호텔서울 총주방장 유재덕, 그는 칼을 내려놓을 때마다 책을 펼쳐들었다.
희고 높은 모자와 흰 조리복을 입은 셰프들이 뜨겁고 날카로운 기기들을 이용해 누군가의 식사를 준비하는 호텔 주방은 베일에 싸여진 공간이다. 날마다 다른 상황, 다른 조건이 주어지지만 한결 같은 맛과 서비스를 위해 주방에서는 매일의 전쟁이 치러진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오래된 호텔에서 외길을 걸어온 중년의 셰프는 주방일 틈틈이 책을 읽고 칼럼을 썼다. 셰프가 고른 책은 대부분 음식에 관한 책이다.
식탁 혁명을 불러온 고추의 모든 것을 다룬 〈페퍼로드〉부터 음식인문학의 고전 〈음식문화의 수수께끼〉까지 41편에는 저자의 경험과 어우러진 흥미로운 음식 이야기가 펼쳐진다. ‘파타고니아 이빨고기’가 ‘칠레산 농어’로 이름을 바꾸고 판매량이 10배 늘었다든지, 요리의 맛은 식재료의 질에 달려 있을 뿐 요리사의 역할은 얼마 안 된다는 것 등등 미식의 안목을 키울만한 이야기다.
■제작 노트
27년차 호텔리어&요리사 유재덕은?
대한민국 최고(最古)호텔의 음식을 책임지는 요리사로서 그의 오랜 경력 중에는 독특하고 의미 있는 경험도 많다. 특히 지난 2017년 10월 덕수궁 석조전에서 열린 대한제국 선포 120주년 기념 ‘대한제국 황실 서양식 연회 음식 재현 행사’가 대표적이다. 대한제국 시절 고종황제가 외국공사를 접견하는 연회를 열 때 선보인 황실 서양식 연회 음식을 고스란히 재현한 행사였다. 문화재청과 배화여대 등이 함께 기획한 이 행사에서 유재덕은 헤드 셰프로서 조리팀을 이끌었다. 조리팀은 철저한 문헌연구와 고증을 거쳐 120년 전 서양식 연회 음식을 완벽하게 구현해냈다. 이 행사는 ‘대한제국 그 비운의 역사와 함께 사라질 위기에 처했던 궁중 식문화의 명맥을 잇는다’는 취지를 훌륭하게 살려냈다는 평가를 받았고, 당시 언론과 미디어, 그리고 문화계로부터 큰 관심과 찬사를 받았다. 이후 2018 평창 동계올림픽 헤드 셰프, 2019년 대한제국 한식 연회음식 재현 헤드 셰프로 활약하며 국내외 귀빈들의 음식을 책임졌다.
식품공학과 출신의 청년이 요리사가 되기까지의 우여곡절
유재덕은 조리학과 출신이 아니다. 대학에서 식품공학을 전공했다. 조선호텔에는 사무직 일반 직원으로 취업했다. 식자재 구입을 담당하면서 드나들어야 했던 호텔의 주방에서 그는 요리의 아름다움에 매혹된다. 그는 요리사가 되기로 작정하고, 자신의 보직을 주방으로 바뀌 달라고 회사에 요청한다.
1990년대 초반, 당시에는 몸을 써야 하는 요리사는 인기 있는 직업이 아니었다. 대학을 졸업하면 무조건 사무직이 되어야만 한다고 여기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사무직으로 취업한 청년이 주방에서 일을 하고 싶다고 하니 다들 의아했다. 하지만 그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호텔의 주방장은 패기만만한 청년에게 기회를 주기로 한다. 단 6개월 이내에 조리사 자격증을 따오면 주방에서 받아주겠다는 조건이었다. 결국 그는 6개월 안에 조리사 자격증을 따내 요리사의 길에 들어선다.
늦게 시작했기에 더 멀리까지 갈 수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주방에 입성한 그는 어깨너머로 요리의 언어를 배웠고, 몸으로 머리고 요리를 익혀 나간다. 유재덕은 남보다 늦게 시작했기에 오히려 더 멀리까지 갈 수 있었다. 호텔의 주방에서 만난 스승과 선배 요리사들은 때론 격려도 하고, 때론 야단도 치면서 그를 이끌어 주었다. 현재 신세계 상무인 조형학 셰프는 그의 상사이자 평생의 스승이다. 그는 조리학을 전공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방에선 같은 나이대의 초보 동료들보다 훨씬 더 초보였다. 그는 책을 찾아 읽고 또 읽으며 핸디캡을 극복해가야 했다. 〈독서주방〉에는 저자가 자신의 초보 시절을 추억하는 장면이 곳곳에 등장한다. 그 이야기들을 통해 저자는 오히려 동료들보다 훨씬 늦게 시작했기에 더 잘 버틸 수 있었고, 더 많은 꿈을 꿀 수밖에 없었으며, 그래서 결국 더 멀리까지 갈 수 있었다고,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가고 싶다고 말한다. 세상에 이름을 남긴 사람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인간은 강점 때문이 아니라 약점을 극복하면서 더 강해지는 것’이라는 보편적 진리를 다시 한번 일깨운다.
다시 책으로! 흘러내린 침으로 망가트린 책들
저자가 총주방장이 되기 이전에 호텔에서 맡았던 업무는 ‘메뉴개발’이었다. 새로운 요리를 계속 연구해야 하는 일이었다. 따라서 그는 조리법에 관한 책들은 제법 콜렉션 하고 있었다. 하지만 ‘좋은 요리사’가 되기 위해서 그가 선택한 것은 ‘음식의 역사’나 혹은 ‘식재료에 관한 사회학서’ 등을 포함한 책들 즉, 음식을 모티브로 한 인문교양서였다. 이 선택이 그야말로 ‘신의 한 수’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