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하는 자의 광주
1979년 10월 26일 저녁,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대통령을 사살했다.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후 18년 동안이나 권좌에 있으면서 종신집권이 가능한 1인 독재체제를 구축하였던 독재자가, 심복 중의 심복이요 공포정치의 전위부대였던 중앙정보부의 총책인 부하 손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맞은 것이다. 그의 죽음과 더불어 한 시대가 갔다. 유신체제와 긴급조치로 상징되는 겨울공화국이 일거에 무너져 내리고 유신의 철권통치에 가위눌려 숨죽였던 민중의 힘이 역사의 전면으로 분출될 새로운 시대가 온 것이다.
비극은 여기서 잉태되었다. 유신체제는 민중의 직접적이고 전면적인 공격에 의해 무너진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박정희라는 최고 권력자가 제거되었음에도 유신체제 그 자체를 만들고 떠받쳐온 유신세력의 힘은 그대로 살아남았다. 독재정권의 보호와 특혜를 받아가며 자기의 손아귀에 엄청난 자본을 집중시킨 독점재벌집단, 경찰과 검찰을 핵심으로 하는 관료집단, 법원과 신문 방송을 거의 완전하게 조종 통제할 능력을 지닌 중앙정보부 등의 비밀정보조직, 한반도에서 자국의 정치적 군사적 이익을 보장해주는 한 어떤 형태의 야만적 파쇼정권일지라도 지지하고 후원해온 미국의 행정부, 그리고 이들 지배집단의 기득권과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국민의 가슴팍에 총칼을 들이댈 각오를 지닌 정치군인집단, 바로 이들 집단으로부터 유신체제를 탄생시키고 유지해온 물질적, 정치적인 힘이 나왔다. 박정희라는 개인은 이들 지배집단의 상징이요 단결의 구심점에 불과할 뿐 결코 유신체제 그 자체는 아니었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