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 왕을 꾸짖다
本書는 《상소-중국편》이어 출간되는 우리나라 역사상 유명하고 중요한 상소를 골라 해설과 함께 엮은 것이다.
상소문은 사라진 왕조시대의 사장된 글이 아니라 그 서슬 퍼런 정의감과 직설의 정직함은 오늘을 살아가는 데도 절실히 필요한 정론이다. 죽음을 무릅쓰고 간했으며, 도끼를 들고 들어가 알렸으며, 벼슬을 버리면서 직간했다. 정의를 위해 외치고 올바른 길을 가기 위해 온몸으로 울었고, 자결을 하면서까지 지키고자 했던 것, 이것이 바로 선비가 가야하는 우국애민의 길이었다.
“눈물을 흘리며 간곡히 비옵니다.”, “이제 또다시 간청하오니 특별히 처분을 내리시어 공사 간을 다 편하게 해 주소서.”, “병이 위독하여 죽음이 임박해 정신이 어두워 말이 조리가 없으니 황공하옵니다.” 상소는 신하들의 간절하고 애절한 하소연이었다.
상소는 왕에게 보여주는 문서일 뿐만 아니라 의사소통 수단이라고도 할 수 있다. 상소를 쓰는 것은 큰 지혜를 요하는 일로서 왕이 듣고 싶어 하거나 듣기 좋아하는 내용이 담겨져야 하는 것은 물론 듣고 싶어 하지 않거나 듣기 싫어하는 내용도 포함되어야 했다. 좋은 일을 고하는 일은 누구나 다 할 수 있고, 또 하고 싶어 하는 일이다. 그러나 나쁜 일을 고할 때에는 왕으로 하여금 듣게 해야 하는 동시에 글을 올린 자신이 왕의 화풀이 대상이 되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해야 했으니 그 자체가 하나의 큰 학문이라 할 수 있다.
상소를 통해 임금에게 문제제기를 함으로써 역사발전에 커다란 공헌을 한 상소문들이 있다.
원나라의 황제에게 직접 상소를 올려 고려의 공녀제도를 폐지시킨 이곡의 상소. 최만리의 한글창제 반대상소처럼 지금의 시각으로는 사대주의에 물들어 있는 한 선비의 시대착오적인 생각처럼 보이나 당시에는 중국과의 외교관계를 의식하여 나라의 안전을 도모하려는 신하의 걱정스러운 뜻이 담겨 있던 상소. 그 누구도 거론하기를 꺼려했던 단종의 복위와 사육신의 복권을 주장하며 100년 묵은 문제를 제기했던 김성일의 상소, 그리고 열다섯 살 난 평안도 기생 초월이 백성들의 고통을 보다 못해 시대의 폐단과 임금의 잘못을 생생하게 적어 올린 상소, 어린 임금에게 치국의 방책을 올린 퇴계 이황의〈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나 율곡 이이의〈만언봉사萬言封事〉처럼 그들이 민족의 성인으로 추앙받는 이유를 그 일단이나마 살펴볼 수 있으며 이들 상소문을 통해 당시의 역사를 생생하게 엿볼 수 있다.
또한 임진왜란 일어나기 1년 전, 일본사신의 목을 베고 전쟁에 대비하라며 피를 토하며 올린 조헌의 상소는 올릴 당시에는 선조가 아무 비답을 내리지 않았으나 막장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김시민(金時敏), 조웅(趙熊) 등 그가 상소에서 천거한 당시?〈?이름모를 이들이 대거 등용되어 임진왜란 중에 커다란 공을 세운다.
이와는 반대로 구한말 한일합방건의서라는 상소문을 올려 결국 친일파 내각으로 하여금 한일합방조약 체결의 구실을 만들어준 이용구의 상소는 친일파들의 사상과 논리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마지막 부록에는 삼국시대부터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중국과 일본에 보냈던 사대하는 표(表)와 소(疏), 그리고 국서를 소개한다.
〈황제시여 제발 고려에서 어린 소녀들을 빼앗아오지 마십시오〉 -이곡(李穀)
고려의 풍속을 보면, 차라리 아들을 별거하게 할지언정 딸은 내보내지 않으니, 이는 옛날 진(秦)나라의 데릴사위와 비슷한 점이 있다고 할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를 봉양하는 일은 전적으로 딸이 주관하고 있기 때문에, 딸을 낳으면 애정을 쏟고 근실히 돌보면서 얼른 자라나 자기들을 봉양해 주기를 밤낮으로 바라 마지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그 딸을 품 안에서 빼앗아 사천 리 밖으로 내보내고는, 그 발이 한번 문밖으로 나간 뒤에는 종신토록 돌아오지 못하게 하고 있으니, 그 심정이 지금 과연 어떠하겠습니까?
고려에 사신으로 가는 자들은 모두 처첩을 욕심내고 있으니, 대저 사신으로 나가는 목적은 장차 황상의 은혜를 선포하는 동시에 백성의 고통을 물어서 파악하고 그 대책을 강구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외국에 사신으로 나가서 재물과 여색만을 탐욕스럽게 구하고 있으니, 이런 일은 금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일이 한 해에 한두 번씩 일어나기도 하고, 한 해 건너 한 번씩 일어나기도 하는데, 이렇게 해서 데려가는 어린소녀의 숫자가 많을 경우에는 4, 5십 명에 이르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일단 선발이 되면 부모와 친척이 서로 모여 통곡하면서 울기 때문에 밤낮으로 곡성이 끊이지 않으며, 급기야 국경에서 떠나보낼 적에는 옷자락을 부여잡고 땅에 엎어지기도 하고 길을 막고서 울부짖기도 합니다.
(해설)
이 상소는 고려판 정신대로 불리는 공녀(貢女)제도를 폐지시킨 역사상 가장 가치 있는 상소이다.
당시 고려에서는 공녀제도 때문에 어린나이에 일찍 결혼시키는 조혼의 풍습이 생겨날 정도였다. 이곡은 원나라에서 벼슬을 하였는데, 원나라가 고려에서 강제로 어린 소녀들을 공출해 감으로 이를 보다 못해 중국의 언관(言官)을 대신해서 원나라 황제에게 올린 상소문이다. 상소문의 애절한 사연을 읽은 원나라 황제는 감동을 받아 결국 이곡이 청한 대로 고려에서 어린 소녀들을 데려오는 것을 그만두게 하였다. 〈본문 중에서〉
〈언문(諺文) 창제의 부당함을 아뢰옵니다〉-최만리(崔萬理)
언문(諺文)을 창제하는 것은 지극히 신기하고 묘하여 만물을 창조하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