퀸 엘리자베스
세계의 여성 지도자들은 왜 엘리자베스를 꿈꾸는가?
엘리자베스 여왕이 이끈 것은 정치가 아니라 국민의 마음이었다
◆ 책 속으로
어린 시절부터 몸에 밴 겸손함 역시 그녀의 또 다른 면이다. 마거릿 로즈는 “여왕은 여왕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여전히 겸손했다. 그렇기 때문에 오만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고 말했다. 여왕이 극장에 갈 때에는 사전에 알리지 않고 객석 조명이 꺼진 뒤에 입장한다. 여왕의 전직 개인 비서들 중 한 사람은 여왕이 “게걸음으로 방 안에 들어가는 모습이 얼마나 신기했는지 모른다.”고 회고하며 여왕은 한 번도 공식적으로, 보란 듯이 입장하지 않았다고 한다. 누군가를 축하하는 자리가 있으면 남몰래 뒷자리로 간다.
-‘서문’에서
여왕은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하여 비범해야만 한다. 그러나 동시에 국민들은 그녀가 아주 평범하지는 않더라도 인간적이어야 한다고 기대한다. 국왕으로서 재임하는 동안 여왕은 두 가지 면모들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만약 여왕이 지나치게 신비롭고 멀게 느껴진다면 그녀는 국민들과의 유대를 상실한다. 하지만 지나치게 보통 사람들과 같아 보인다면 독특한 신비감 역시 잃게 된다.
2007년 버킹엄 궁에서 열린 가든파티에서 여왕은 손님들에게 “멀리서 오셨나요?”라는 식의 일반적 질문을 던진다. 한번은 어느 여인과 인사를 나눈 뒤 그 여인이 “무슨 일을 하시나요?”라고 물었다. 며칠 뒤 여왕은 친구들과 만나서 그 일을 회고하며 “그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나지 않았다.”고 했다. 국민들과 숱한 만남을 가졌지만 그런 질문을 해온 사람은 아직 없었다.
영국에서는 권력과 영광이 구별된다. 엘리자베스 2세는 죽는 날까지 재위하며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 여왕의 첫 수상이던 윈스턴 처칠은 1953년에 이렇게 표현한 바 있다. “큰 전투에서 참패하면 의회는 정부를 교체한다. 큰 전투에서 승리하면 군중은 여왕에게 찬사를 보낸다.” 소속 정당이 의회에서 다수를 차지하면 정부를 구성하여 권력을 쥐는 수상들은 선거의 변수에 따라 오고 가지만 여왕은 국가의 수장으로 남는다. 여왕은 다스릴 권력은 없지만 소극적 권한을 가진다. 여왕이 있는 한 어떤 수상도 일인자가 될 수 없다. 전 상원 지도자이면서 보수 정치인이었던 7대 솔즈베리 후작 로버트 개스코인세실은 이렇게 말했다. “여왕은 독재를 더 어렵게 만들고 군사 쿠데타를 더 어렵게 만들며 칙령으로 통치하는 것을 더 어렵게 만든다. 왜냐하면 여왕이 존재하고 따라서 정당한 절차가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서문’에서
대관식의 준비는 나라가 전후의 배급제와 경기 침체에서 벗어나기 시작하면서 영국민들을 애국심과 부푼 기대로 단합시켰다. 마거릿 공주는 그것은 “마치 불사조의 시간phoenix-time 같았다. 모든 것이 잿더미에서 일어났다. 이 눈부시게 아름다운 여인이 있으니 무엇이든 점점 더 좋아지는 것을 어찌 막으랴.”라고 말했다. 처칠이 말한 새로운 엘리자베스 시대의 도래는 환상일지 몰라도 당시에는 영국 국민들의 상상력에 불을 댕겼으며 레베카 웨스트의 말처럼 “국가의 문양이었고 국민 생활의 상징이었으며 우리들 자존심의 수호자”였다.
-chapter 4 “아가씨들, 준비됐나요?” 중에서
가는 곳마다 군중은 넘쳐났고 열광했다. 환영 나온 선박들이 시드니항을 메우다시피 했고 한 통계에 의하면 호주 인구의 4분의 3이 여왕을 보기 위해 모여들었다. 27세의 나이에 그녀는 “세계의 연인”으로 칭송받았다. 그러나 국왕 부처는 현지의 명사들을 도취하게 만들지 않았다. “그 아부의 수준이란 정말 대단했다. 가히 목불인견이었다. 그들의 아부에 맞장구치면 제일 편했겠지만 나는 의도적으로 그러지 않았다. 너무 인기를 끌지 않는 쪽이 안전했다. 그 정도로 타락해서야 되겠나.”라고 필립은 회고했다. 모후는 그들이 이런 공적인 모습과 사적인 모습을 구별하는 본능을 뒷받침해주었다. 1954년 3월에 그녀는 딸에게 보낸 편지에서 “한 사람이 국가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 도구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감동적이며 동시에 나를 겸손하게 만드는 것인가 하는 점을 느끼지 않니”라고 썼다.
-chapter 5 ‘국정’ 중에서
1970년 2월 25일 새로운 시대의 서막을 장식하는 여왕의 이미지가 안니고니의 초상화에 담겨 국립 초상화 박물관에 전시되었다. 그의 첫 번째 초상화에서 보였던 화려함과 아름다움은 배제되고 훌륭하지만 동시에 낯설게 느껴지는 놀라운 그림이었다. 이 그림에서 그녀는 대영제국을 상징하는 붉은색 휘장을 두르고 별다른 장식이 없는 맨 머리를 한 채 저 멀리 낮은 지평선 위로 보이는 텅 빈 저녁 하늘을 배경으로서 있었다. 텅 빈 배경은 그녀가 짊어진 고독한 직무의 막중함을 강조하고 있었다. 그녀의 표정은 엄격하지만 눈매는 어딘가 애잔해 보였다. 이 정치적, 사회적 격변기에 안니고니는 굳은 확신과 헌신 속에서 나라와 국민을 바라보는 여왕의 모습을 포착했던 것이다.
-chapter 10 ‘침묵의 고리’ 중에서
◆ 저자 소개
샐리 베덜 스미스(Sally Bedell Smith)
다이애나 왕세자비, 존 F. 케네디 전 대통령 부부, 클린턴 전 대통령 부부 등의 베스트셀러 전기를 집필했다. 1996년부터 ‘버라이어티 페어(Variety Fair)’의 편집자였으며, 「타임」과 「뉴욕 타임스」의 문화 뉴스 기자로도 활동했다. 1982년 매년 저널리즘에 기여한 6명을 선출하는 ‘Sigma Delta Chi Award’를 수상했다.
그녀가 펴낸 전기 가운데서도 단연 돋보이는 이 책은 6개월간 250명이 넘는 엘리자베스 여왕의 주변 인물들을 인터뷰하고, 백여 권이 넘는 책과 온갖 미공개 자료들을 읽어가며 탄생시킨 역작이다. 샐리 베덜 스미스는 왕실의 신임을 얻어 윈저 성을 샅샅이 취재하는 영광을 얻었으며 여왕을 수차례 직접 만나기도 했다. 또한 찰스 왕자와도 식사를 함께하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왕실 가족과의 이 같은 만남은 유례가 없는 일로 어떤 전기 작가도 이런 혜택을 누린 적이 없다. 그러나 샐리 베덜 스미스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여왕의 친구들, 수석 고문, 집사 등 여왕의 최측근은 물론 성공회 주교들, 정치인들, 조지 부시 및 클린턴 전 대통령 등 여왕과 가깝게 지낸 국내외 인사들을 총망라하여 인터뷰를 진행했다. 지금껏 여왕에 대해 알려진 공식적인 사실들 외에 어디에도 노출된 적 없는 사적인 이야기를 엿볼 수 있는 유일한 책이다.
www.sallybedellsmith.com
◆ 역자 소개
정진수
서강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미국 일리노이 주립대 연극학 석사 과정을 수료했다. 성균관대 영문과 및 예술학부 교수를 역임했다. 현재는 ‘민중극단’ 상임 연출을 맡고 있다. 『브로드웨이 뮤지컬』, 『자유주의 전체주의, 그리고 예술』 등 영미권의 수많은 책들을 번역했다.